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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빌려온 시간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잘못된 시간이 사라지고 있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내는 일이란   내 마음의 잡초를 걷어낸 후에라도   서로의 발자국을 확인해야만 했네       꽃향을 따라 나비가 길을 내듯   불 밝힌 오두막을 향해 길을 내어야했네   머물 수 없는 어둠의 울타리를 넘어야 했네       “괜찮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네   비장한 가을 하늘은 높아만 가는데   한 걸음 발을 뗄때마다 이명은 사라지지 않네       내게는 빌려온 시간이 있네   그 시간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네   지나 보니 내 것이 아니었네       내가 어둠의 청색이 가라앉는 동안 길을 내었네   먼동이 트고, 하루가 밝아오는 언덕에 서네   바람은 지나온 시간을 밀어내고 있네         창밖을 봅니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립니다. 먼 나라, 꿈도 꿀 수 없는 하늘에서 빈들로 여린 동작으로 눈이 내립니다. 시야에 꽉 찬 풍경은 하얀 눈의 여백으로 일상의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눈입니다. 밖으로 나가 눈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목적도 없이 발끝이 닿는 곳으로 갑니다. 발자국이 찍힌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았습니다. 이 발로 그 긴 시간을 걸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제자리인데 나는 눈길을 걸으며 다시 태어납니다. 내 볼을 만지는 눈은 어느새 녹아 눈물이 됩니다.     내 것이라 여겼던 시간이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담을 쌓고 작은 창문을 내고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던 바깥세상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라는 말을 잊어 버리고 살아왔던 시간이 거기 있었습니다. 함께라는 말. 그 말은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함께였던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차마 그 손을 놓아줄 수 없을 겁니다. 눈길을 걸으며 지나온 나의 시간으로 눈을 돌립니다. 나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살아온 날들이 보입니다. 그 시간이 낯설어집니다. 꼭 빌려온 시간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운 사람과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함께 뜨거운 커피를 나누고 싶습니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짙은 회색의 하늘을 보고, 서로의 걸어온 길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이 번쩍 뜨이는 반가운 사진을 찍고, 아쉬워 돌아오는 밤길을 함께할 수 있는 그런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참 좋아요” 활짝 웃는 그리운 얼굴이 차창을 따라옵니다. 다시 아침은 오고 또 날이 저물어 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신기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잠든 나를 비추는 그 별은 아침이 되면 하얗게 부서져 무너집니다.     이별이란 단어와 이별하는 날을 꿈꾸어봅니다. 어느 날 함께였던 모든 것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 위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새하얀 눈이 내리고,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밤이 지나고 나면 동쪽 하늘 언저리에 당신의 아픔을 덮어줄 푸른 새벽이 올 것임을 압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간 동쪽 하늘 가을 하늘 위로 바람

2024-11-25

[문예마당] 인간의 잔인함·뻔뻔함은 어디까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늦더위에, 가을장마까지 겹쳐 푹푹 찌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화창한 날씨로 변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눈이 시릴 정도다.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쾌청한 하늘을 보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은 엉망진창이다.   세상이 날로 더 악해지고 있다. 한국이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살기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각종 재해와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도 사악하게 흘러간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한국 사회가 총체적 난국처럼 느껴졌다. ‘마약 청정국’도 옛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마약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묻지마 살인’ 등 끔찍한 뉴스가 끊이지 않더니 급기야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밝혀졌다. 이 사건은 여고 시절 공포에 떨며 읽었던 애드거 앨란포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를 소환하게 했다.     ‘검은 고양이’는 단순한 공포 소설을 넘어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던 고양이를 학대하고 죽인 후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다 아내까지 살해하고 발각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 경험들이 ‘검은 고양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약하자면, 온화한 성격에 동물을 아주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가 술에 중독되면서 점점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변한다. 술에 취해 자신이 기르던 검은 고양이 ‘플루토’의 한쪽 눈을 도려내고 나중에는 풀로토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한다. 그 후, 그는 술집에서 플루토와 닮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를 데려와 또 기르기 시작한다. 이 고양이 역시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한다. 결국 이 남자는 두 번째 고양이도 도끼로 죽이려다 실수로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     아내의 시신을 지하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감추고 벽을 새로 발라서 범행을 숨긴다. 아내가 죽자 기르던 고양이도 자취를 감춘다. 아내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경찰이 집을 방문한다. 경관들이 집을 훑어보고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그는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질렀다는 교만한 마음에 벽을 두드린다. 그 순간 벽 뒤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상히 여긴 경관들이 벽을 허물게 되고 그 안에서 아내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고, 아내의 시신과 함께 산 채로 묻힌 두 번째 검은 고양이도 발견된다. 결국 그는 체포되고 만다.     공포와 긴장 속에서 읽었던 소름 끼치는 ‘검은 고양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지난 9월 하순 경남 거제의 한 주거지에서 16년 만에 발견된 시신 때문이다. 한 남성이 말다툼 중 동거하던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여행용 가방에 시신을 넣어 유기한 사건이다. 그는 동거녀와  살던 옥탑방 바로 옆 베란다에 가로 39cm, 세로 70cm, 높이 29cm 크기로 벽돌을 쌓은 다음 시신이 담긴 가방을 넣고 10㎝ 두께의 시멘트를 부어 범죄를 은닉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무려 8년이나 더 살았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그의 범행은 16년간 아무도 몰랐다. 10㎝ 두께의 시멘트로 은닉한 탓에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존엄을 훼손하는 장면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범행은 옥상 누수공사를 하던 중 드러났다. 작업자가 콘크리트 구조물을 파쇄하다 시신이 담긴 여행용 가방을 발견하면서다. 시신은 백골 상태가 아닌 미라처럼 된 상태였다. 다행히 지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완전범죄는 없다’, ‘반드시 잡힌다’는 말이 있다. 특히 과학의 발달로 범인 체포에 지문 감식과 DNA 분석이 큰 역할을 한다. 과학수사팀 사무실에는 ‘모든 시신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문구가 곳곳에 걸려 있다고 한다. 과학 수사 요원들은 ‘스치기만 해도 흔적이 남는다’고 말한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는 말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또는 해서는 안 될 고약한 짓을 했을 때 하는 말이다. 천인공노(天人共怒)라는 말도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일이나 인간을 두고 쓰이는 낱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앞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사람을, 그것도 한때는 사랑해서 함께 살았던 동거녀를 잔인하게 살해해서 암매장한 집에서 태연하게 8년씩이나 일상생활을 했다는 게 소름 끼친다. 인간의 잔인함과 뻔뻔함은 어디까지인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순자의 ‘성악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가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의미이다.     순자는 예의 같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교정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규범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말한 암매장 사건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생명과 법을 경시하는 풍조와 개인의 분노가 사회 전반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더욱 강력한 법 집행과 사회적 경각심이 필요하다. 위의 사건을 통해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한 소절이다.  한국의 가을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쾌청한데 세상은 왜 이리 혼탁하기만 할까?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잔인함 수필 한국 사회 가을 하늘 다음 시신

2024-11-07

[문예마당] 가을 소고

어머니의 묘소를 내가 사는 근교 공원묘지에 모셔 놓고도 여름 내내 한 번도 찾아가 뵙지를 못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나는 너 오기만 기다린다”며 늘 현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곤 하셨다. 추석에 가족들과 함께 산소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나 혼자 먼저 어머니를 찾아가 ‘모녀 타임’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커피와 국화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산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공원묘지에는 변화가 있었다. 묘지 확장을 위한 개발공사가 한창이었다.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이 사각 모양의 비석을 이고 죽음의 선배들과 함께 잠들어 있는 광경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아니, 이렇게나….” 놀라며 쭉 둘러보는 새 비석 가운데는 무슨 연유인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람이 꽤 많았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났다.     올여름에는 유난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고, 불경기를 지나면서 광란의 총기 앞에 무참히 생명을 빼앗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부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여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묘지는 고금의 사람들이 같이 사는 장소다. 먼저 간다고 아쉬워할 것 없고, 뒤에 간다고 좋아할 것도 없다. 앞으로 같은 장소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므로…. 수없이 깔린 묘비를 둘러보면 인간의 죽음이란 가을 나무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과 다를 게 없는 자연의 조화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내용의 묘비명을 읽어 보면서 책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묘비명들이 떠올랐다. 헤밍웨이는 아내의 묘비에 “조용히 걸어 가시요. 이 사람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이 깨는 날이면 나는 또 이 사람에게 바가지를 긁힐 테니까요”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다.     또 스탕달의 묘비에는 “살았노라 썼노라 그리고 사랑했노라”고 쓰여 있고, 교육의 성자 페스탈로치의 묘비엔 “모든 것은 남을 위해서였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글이 있다. 그런가 하며 미국 국립묘지에 있는 무용용사 묘비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미국의 무명용사가 이곳에 명예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주먹을 쥐고 간 사람”이라는 재미있는 내용의 묘비명도 있다고 한다.     이날 읽어본 묘비명 중에는 “아! 어머님”이라는 짧은 절규가 가장 찡하게 와 닿았다. 묘비명은 망자의 유언에 따른 그의 좌우명일 수도 있고, 자손들이나 지인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새기기도 한다. 어떻든 묘비에 새겨진 글은 살아서 행동했던 죽은 자의 명함이고 얼굴이다.   오랜만에 어머니 곁에 앉으니 함께 한 모녀의 세월을 뒤돌아보게 된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의 거룩한 모정에 그리움이 가득 차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평생을 기다림의 시간만 안겨 드렸던 불효를 아픔으로 반성한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만 삼키고 있을 때 “얘야, 괜찮으니 마음 편히 가져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단다 ”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사방을 돌아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어느덧 가을이 와 있었고 , 길게 가을 구름이 깔렸다.   가을은 대기의 열을 식힌다. 가을 하늘 아래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은 경이롭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고 무성한 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곧 가을이 깊어지면 모든 것은 떨어지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가을 낙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때가 되면 우리도 흙으로 돌아간다. 가을이 오면 우리의 정서는 으레 허망함과 쓸쓸함, 애상과 애수를 느끼지만 가는 세월이나 자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이나 나무,숲, 자연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꾸밈없이 보여 줄 뿐이다.   자연은 꾸미지 않는다. 있는 것을 없는 척, 없는 것을 있는 척, 추한 것을 아름다운 척 치장하거나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굳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애쓰며 서두르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잎이 지고, 꽃이 핀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이고 또 그 자연스러움이 겸손이다. 겸손은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시의 문명에 휩쓸려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가을은 어떻게 살고 어떤 죽음을 남겨야 하는가를 낙엽을 통해 가르침을 주며 인생을 생각하고 배우라고 한다.     슬기로운 눈을 떠 자신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은혜로운 계절이다. 낙엽처럼 나도 누군가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뒷받침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다. 노력해야겠다는 의욕이 바로 소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겸손으로, 따뜻함으로, 온유함으로 곱게 물든 인간 단풍이 되어 사람들 가슴에 그리움으로 오래오래 간직되고 싶다는 기도를 이 가을에 드리고 싶다. 김영중 / 수필가문예마당 가을 소고 가을 낙엽과 가을 소고 가을 하늘

2024-10-0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니 바람이 불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앞으로 걷고 있어도 뒤를 자꾸 돌아다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주운 나뭇가지로 버티며 걷고 있다. 계단이 된 나무 뿌리를 딛고 오르지만 정상은 숲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을 따서 책갈피에 끼운다. 바람에 넘어가는 책장을 고정하려고 길고 뾰족한 잎으로 읽고 있는 페이지를 고정해 놓는다. 한 문장 한 문장 머리에 담고, 가슴에 품고, 기억해내고, 소리내 읽는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시간 속에 머물며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진 숲속에선 사람의 기척보다 어울리는 새소리가 들린다. 잎사귀 자라는 소리도 들리고, 땅속으로 파고드는 뿌리 뻗는 소리도 들리는 듯 다정하다. 한없이 깊은 숲으로, 하늘이 가까워지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행복을 보이는 조건으로 따지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느낄 즈음 낮고 초라함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기쁨의 광맥을 캐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경외와 존경의 눈빛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라도 늘 행복만 일만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늘 불행한 일만 일어나지도 않는다. 늘 불행이 자기 운명인 양 불행 속에서 깨어나고 잠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행을 행복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겨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소망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지난 겨울 찬바람에 소나무 가지 휘청였던 눈발과 함께 깊은 불면과 통증으로 숨을 몰아쉬며 견디었던 날들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는 말대로 꽃피는 봄을 지나며 두번째 시집을 출간한 후 뒤란의 눈 녹듯 사라지고 있다. 행여 다시 시작될 지 모르는 통증은 가을 하늘로 날려 보내야겠지. 다신 품 안으로 안으면 안되겠지. 나를 지나 멀어지는 모든 것들에게 절망 하지 말아야겠지. 내려 놓아야 할 것은 내려 놓아야 하고, 떠나 보내야 할 것은 보내야 하기에 다만 그들에게 축복의 말을 잊지 말아야겠지. 어디에서든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가기를 바랄 뿐, 잊혀 질 때까지 느리게 아파오는 통증은 바람에 천천히 지워지는 구름이 되겠지. (시인, 화가)     내게 주어진 시간       마음에 마음이 포개질 땐 빛나는 보석이었지 / 물결과 물결이 부딪칠 때 영롱히 솟아난 방울이었지 // 눈물이 말라가던 날이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빛을 잃어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 물소리 같이 지나가던 날 /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무너지던 날이면 / 물방울처럼 슬픔이 솟아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 피어 오르는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 영원할 것 같이 움켜 쥐었던 날들이 잦아들면 / 숲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무심히 스쳐 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 잔잔한 비가 호수에 뿌려질 때 / 하늘 푸르름에 풀꽃이 기지개를 펼 때 / 별빛 내려와 서늘한 언덕의 등을 어루만질 때 / 당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친 허리를 세울 때 // 입술의 달콤함이 쓴맛으로 변할지라도 / 풀숲을 지나 하늘을 향해 갑니다 / 하늘 아래 서 있겠습니다 / 받은 것을 돌려드려야 할 시간 / 당신 눈에 비친 말들을 써내려 가야 할 시간 / 이방인의 뜰에서 눈물을 닦아야 할 시간 / 내 것이 아닌 당신의 것이 되어야 할 시간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시간 마음 하늘 푸르름 가을 하늘

2023-08-21

[기고] 추수감사절의 기도

 1년의 농사를 수확하고 갈무리하는 추수감사절은 어느 명절보다 우리 마음에 뿌듯함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 고국에서 추석 명절을 지낸 경험이 있는 타향살이 1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더욱 살가움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중년을 지나면서 언제부터인가 1년 중 가장 큰 명절은 풍요로운 고국의 추석을 일깨우는 추수감사절이라고 생각했다. 혹자는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 연초가 명절의 대표 주자라고 한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는 사계절의 특성을 비교해 볼 때 봄은 한겨울의 동면에서 깨어나 대지가 농부의 땀과 함께 역동적인 창조를 시작하는 절기이고, 여름은 풍성한 초록의 물결을 만들고, 가을은 오곡의 결실을 거둬들이는 계절이다. 가을은 분명 한 해의 완성이고 1년의 매듭이라고 생각된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대서양의 높은 파도와 굶주림의 사경을 뚫고 1620년 11월 21일 아메리카 대륙의 케이프 코드의 프로빈스타운에 도착했다. 북미 대륙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토착 질병 등으로 봄을 맞이하기 전에 이들의 절반은 사망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이듬해인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 청교도인들은 첫번째 농경 수확을 한 뒤 재단 앞에서 ‘절대적 감사’ 기도를 드렸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의 구애됨이 없이 한 인간으로서 창조주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경건한 마음의 헌신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는 지난해부터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났다. 어느 동물 세계보다 집단의식이 강한 인간 사회의 생태계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반석같이 튼튼하리라 생각했던 모두의 생활패턴에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심과 끝간 데 없는 과학의 발달이 이들 재앙의 원인이라 생각된다. 생태계가 감당할 수 없는 탄소배출, 지나친 과학의 발달, 무분별한 자연파괴 등이 팬데믹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번 팬데믹 사태가 지구촌을 사랑하는 창조주의 마지막 경고로 생각된다.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인간의 과욕을 다시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자연의 어떤 재앙과 희생에도 불평보다 감사를 받아들이는 청교도인의 겸손함이 우리의 마음이기를 기원한다.       지구촌 모두를 휩쓴 코로나는 우리에게 삶과 생명을 위협하고 경제적 시련을 주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업을 맡긴 건축업자의 행방불명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예기치 못한 대수술도 했다. 여기에 40여년 다니던 교회의 문제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지난 1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헤매었고 오해로 인한 인격적인 명예실추도 경험했다.     올해의 하늘은 예년의 어느 가을 하늘보다 유난히 높고 청자 색깔이 그리 고을 수가 없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초가을의 바람은 어렸을 적 싱그러운 고국을 연상시킨다. 석양의 들녘에 고즈넉이 홀로 서있는 갈대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갈대 씨앗을 품은 흰 꽃술들이 푸른 창공을 날아간다. 산자락 양지 바른 언덕 위에 홀로 핀 노란 민들레꽃에서 생명의 경이를 본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지난날 세상의 고뇌와 시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다.     추수감사절과 시련을 통해 복을 주신 창조주께 다시 감사드린다. 이영송 / 전 코리아타운 시니어센터 이사장기고 추수감사절 여름 가을 가을 하늘 추석 명절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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